실존과 본질

반응형
실존과 본질

실존주의에서 실존은 본질의 현상에 해당한다.


만일 누군가 볼펜을 만들었고, 볼펜을 누군가가 글을 쓰는데 사용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새로운 용도로 이렇게 저렇게 사용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 하더라도 이 볼펜의 활용은 한계를 지닌다.

그 이유는 누군가가 처음 볼펜을 만들 때 이것을 쓸 용도를 생각하고 모양을 떠올려 만들었기 때문인 것.

여기서 만들어진 볼펜이 바로 실존이며, 그것을 만들기 위해 누군가 떠올린 최초가 본질이 된다.

실존주의나 생철학 혹은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 이전에는 모든 철학자들의 관심은 볼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반면에 실존주의자들은 형이상학적 그 본질에 대해 탐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진 '나'라는 존재에 주목하는 사람들이다.


사르트르가 말했던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의 의미는 바로 나에게 주어지는 순간들을 통해 개인 스스로, 즉 나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을 말한다.

플라톤 철학처럼 인간의 본질은 이데아를 추구하는 삶이 본질이라고 인간 삶의 목표가 정해지는 것은 그 개인 스스로의 가능성은 제한되었다는 것이 사라트르와 같은 실존주의자인 것.

우리 인간은 본질이 존재하는 본질계 혹은 형이상학의 세계가 아닌 지금 이순간을 살아가는 존재로, 타인이 만들어낸 본질에 구속될 것이 아니라 자신과 만나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실존과 본질에 대해 조금 더 근접하기 위해서는
개념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할 필요를 느낀다.
 
모든 인간의 의사소통에 있어서 그 가장 강력한 수단은 언어이고 특히 철학에 있어서는 오직 언어를 통해서만 그 체계가 수립되고 전달된다.
 
모든 학문의 도구가 되는 이러한 "언어의 의미"를 한자어로 써서 '개념'이라고 한다.


따라서, 모든 학문에 있어서 개념의 이해는 그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개념적으로 보면 서양철학에서 실존과 본질은 서로 반대개념이 아니다.
 
본질은 논리상의 개념으로서 그 반대가 되는 개념은 현상이다.

이에 반해 실존은 사물 즉, 실재(reality)의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개념인 것.

이는 논리상의 개념인 본질과 현상은 언어의 사용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언어는 추상적이라는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다. 이를데면 우리가 '볼펜'이라고 말할 때, 그 볼펜은 실제로 존재하는 구체적인 어떤 볼펜 하나가 아니라 일반화되고 추상화된 볼펜이다.



여기에서 본질과 현상이 분리되는 것.

추상화된 '볼펜'이 본질이고 구체적인 '볼펜'이 현상이다.

물론 언어가 없었다면 인간은 모든 사물을 구체적인 현상으로만 파악했을 것이다.

한편 본질은 단순한 추상화를 넘어서 현상의 원인으로써 사용되기도 한다. 이때는 본질이 어떤 현상의 배후에 있으면서 그 현상을 낳은, 즉 있게 한 그 무엇이 되는 것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이 명제는 모든 사물의 실존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실존만을 그 대상으로 한다는 것.

왜냐하면 인간이 아닌 다른 사물의 경우에는 일반화 내지 추상화로서 본질이 선재가능하고 필요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언어가 없는 일반 사물의 경우에는 본질이라는 것이 선재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인간의 경우에는 이러한 일반화 내지 추상화로서의 본질이라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이 실존주의의 입장이며 그러한 입장에서 이러한 명제가 나온 것이다.

 
"인간은 그 존재 및 행동 양식을 결정하는 본성을 갖지 않으며 이 양식이란 곧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들일 뿐이다"라는 것이 사르트르의 입장이다.

하이데거 역시
"현존재는 항상 그 자신의 가능성이다"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본질이 생성하고 그로부터 존재=현상 내지 실존이 나오는 것이 아니며 존재의 배후에는 가능성만이 존재한다는 것.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가능성들 중에서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고 결국 본질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철저히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이 실존주의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먼저 존재하고 세계에 던져진 후에야 그 본질이 규정된다는 것이며 즉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세 번이나 이혼한 마거릿 미드에게 기자들이 왜 또 이혼했느냐고 물었다.

그때 그녀가 되물었다 

"당신들은 그것만 기억하나 내가 세 번이나 뜨겁게 사랑했다는 것은 묻지 않고."

시 쓰는 어려움을 말한 루이스에게 독자들이 왜 하필 시를 쓰느냐고 물었다.

그때 그가 되물었다

왜 당신들은 그것만 묻나 "내가 몇 번이나 간절히 무지개가 있는 세상에서 살기를 원했다는 것은 묻지 않고."

그렇다. 우리는 본질은 놓치고 현상만을 붙잡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또 실존을 놓치면서까지 이데아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닐까.

고맙고 사랑합니다. ~안하림작가~

>출처 - <인문학> 中에서-




반응형

'□ 전하고싶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있는 그대로 살자  (0) 2018.11.10
이 아침의 행복을 그대에게  (0) 2018.11.09
인생의.여섯 발의 총알  (0) 2018.11.08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